본문 바로가기

Psychology_Korean

비실존적 삶 에서 실존적 삶으로_ 기억 속의 우물

2019 – 2 학기

서양현대철학

철학 에세이

 

 

 

 

진심 어린 이해’ : ‘실존적인 삶’을 향한 .

 

심리학과

오범준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영화 "굿 윌 헌팅" 중에서

 

영화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별다른 특수 효과 하나 없이,

나지막하게 뱉는 이 한마디는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왜 ? 이 반복되는 한 마디의 파동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는 큰 파도가 되어 울렁거리는 걸까.

왜냐하면, "나한테" 말해주는 것 같으니까.

분명히 상대 배우에게 뱉는 말이지만,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 같으니까.

멧 데이먼의 주인공에 관객들, 아니 우리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정이입하고 있으며

멧 데이먼의 삶 중에서 일부를 우리의 삶과 동일시하고 있으니까.

각자의 개개인들은 특별하다.

그 말은 즉슨, 우리 모두는 각자가 갖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아니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만, 말하기 두려운,

각자만의 보이지 않는 흉터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 "흉터"는 "흉터"가 아닐 수 있다.

숨쉬는 게 당연하고, 물 마시는 것이 당연하듯, 그저 일상의 일부분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작은"일에 불과할수도.

임상심리 분야에서, "현상학적 장애" 라는 단어가 있다.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담자가 바라보는 "주관적인 현실"이 내담자에게 "객관적인 현실"이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 그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 일수도 있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그 사람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 일수도 있다.

나에게는 어려운 일아, 그 사람에게는 쉬운 일 일수도 있다.

내담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고 내담자가 그러한 시각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발목이 삐끗한 정도의 가벼운 사건일 수도 있지만,

내담자에게는 온몸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가버리는

큰 쓰나미, 화염, 허리케인, 등과 같이,

무기력감 속에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일수도.

그렇기에 사람들은 ‘진정한’ 위로를 듣고 싶어한다.

무조건적인 위로도, 괜찮다라는 긍정도, 힘을 내야 한다라는 지시적인 채찍질이 아니라,

섣부른 위로도 하지 않고, 옆에서 기다려주면서, 나의 존재와 나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내가 준비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그런 "위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수많은 위로와 긍정의 말을 듣지만,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괜찮아. 잘 되거야.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런 것이니 좌절하지 마라’ 등.

그에 비해 ‘It’s not your fault’. ‘니 잘못이 아니야’. 이 한마디는 위의 피상적이고 겉치레식의 위로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상대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위로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의 고통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는 상태에서, 상대가 준비가 되었을 때, 상대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묘사된 주인공의 변화를 중심으로,

‘진심 어린 이해’가 어떻게 한 사람을 ‘멜랑꼴리’의 상태에서, 실존적 삶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멧 데이먼’은 비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천재적인 두뇌와 훈훈한 외모를 가진 그이지만, 불우했던 과거 시절로 인해, 방황한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했던 과거의 경험이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를 힘들게 한다.

주인공 윌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말하기 힘든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거는, 그 과거의 경험은, 다른 모든 과거의 경험과 다르게 왜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 경험으로부터 아파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과거의 일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귀인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안다. 개념적으로는, 내 탓이 아닌 것을 안다.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귀인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맥락과 상황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릴 때 부모님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에서, 부모님들끼리 왜 저렇게까지 싸우는 걸까를 알아내고자 할 때,

그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결론은 ‘내가 못나서’이다.

내가 조금 더 모범생이었다면,

내가 조금 더 효자였다면,

부모님들께서 저렇게 싸우지 않았을 텐데’ 이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님이 집을 나간 것인데도 불구하고

‘ 내가 엄마 대신 더 맞았더라면,

혹은 내가 조금 더 크거나 힘이 쎄서 아빠를 제지할 수 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편한 사람들이 있다.

타인에 대한, 혹은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자기 자신 탓을 한다.

왜? 본인을 비난하는 것이 깔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어머님이 아버지의 학대로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이 더 힘들어했다.

그러나, 내 안의 이 불만과 부정적인 에너지를 표출은 해야 했기에, 나를 공격했고, 그 에너지를 표출한 ‘느낌’을 갖게 된다.

즉, 나를 내가 괴롭히는 것이 편하니까, 이게 더 좋으니까 과거의 아픈 기억에 대해 자기 탓을 하는 것이다.

‘It’s not your fault’. 이 한마디는 사람들 각각이 지니는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가준다.

그리고 그 기억속으로 잠시나마 스며들게 해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당시 아팠던 ‘나’ 를 다시 만나게 해준다.

자기 자신이 후회했던 과거의 그 순간,

자주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 더 노력했다면, 내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들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기억,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그 기억을,

다시 보는 것, 다시 정의하는 것, 그 기억에 대해 다른 스토리를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치료이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기 위해 상담을 받는다’

Gestalt.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다. 가정의 불화, 혹은 뼈아픈 실패 등은 뒤바꿀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내 상처를, 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표현은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 기억을 잊을 수도 없고, 그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꿀 수도 없다.

나를 힘들게 했고, 현재로 고통받고 있는 기억을,

내 삶 전체에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 수도 있으니까,

단, 내 삶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아프기만 했던 기억이 사실은 나를 성장시킨 기억이 될 수 있고,

실패라고 여겨졌던 과거가 성공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내’탓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탓이라고 여긴 과거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그 당시의 내 선택이 ‘당연’했으며, 비난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실된’ 위로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그 ‘기억’에 마주해야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한다’.

자신의 ‘아픈’ 기억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 기억들은 고통스럽다.

평소에 사람들은

‘난 힘들지 않다고,

난 충분히 극복했다,

그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라고 말을 하지만, 그 기억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마치 그때의 나약했던, 연약했던 ‘나’로 돌아가듯이, 사람들은 다시 작아진다.

그 상태에서 정체모를 불안감을 느낀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마치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은,

당시의 아팠던 모든 감정들이, 겨우겨우 눌러 놓았던 그때의 감정들이,

파도가 되어 나를 엄습할 것만 같은 불안감들이다.

그때의 그 감정을 느끼기 싫었기에, 그때의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에 한없이 달려오고, 노력해서 지금의 삶의 양식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기억’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나’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억’을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부인한다.

자신이 그러한 ‘기억’,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거나, 설령 가리지 못하더라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라며 연기를 한다.

상처로 비유하자면,

상처가 났는데, 그것에 약을 바르고, 연고를 바르고, 치료되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밴드만 붙여 놓는다.

그리고, 그 상처가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그런 상처를 갖고 있지 않다 라고 꾸미기 위해,

혹은, ‘나’는 그런 힘든 기억들 조차도 멋지게 이겨낸 사람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상처를 그대로 둔다.

어디인가 자신이 불편함과 불행함을 느끼는 요인들이 있는데,

그것을 마주하고 직면해야 할 상처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야 할 치부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처위에 ‘갑옷’을 계속 쌓아 나간다.

아플 때마다, 연고를 바르지 않고, 더 두껍고 화려한 ‘갑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 사이 그 상처는 더 곪고 곪아서 이후에는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의미’를 두는 대상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두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공부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자신이 맺고 있는 친구관계 혹은 연인관계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그런 대상들, 혹은, 이와 같이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상처에 대한 보상의 특성을 띨 수 있다.

내가 갖고 잇는 상처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학업 혹은 성취에 열중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 자주 무시를 당하던 것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다시는 무시 받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수담으로 학업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는 것일 수 있다.

지나치게 연인에게 집착하거나 몰두하는 사람은 과거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을 현재 연인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들러가 말했듯, 열등감은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월성을 얻으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월성이란,

남들보다 나아 진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신에 있어 우월해진다는 것이다.

- 아들러

 

그러나, 열등감에 근거하여 자신이 의미를 두고 하는 행위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무시 받기 싫어서 학업적인 성취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그 내면에는,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진실된 욕구가 있을 수 있다.

학업적인 성취는 그에게 있어, 무시당하는 상황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랑 혹은 관심을 받기 위한 그만의 수단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가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자신도 어렴풋이 안다.

자신이 하는 공부가, 자기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현재의 일상, 현재의 삶의 양식을 반복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정학히 말하면, 자신의 상처를,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받았던 상처를 다시 받게 될까봐 그저 자시의 일상에 더더욱 몰입한다.

비록, 현재의 작은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과거 기억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으니까.

현재의 삶은, 현재의 삶의 양식은, 자신이 그 ‘기억’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개월 동안, 몇 년 동안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 일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기억’이, 해결되지 못하는 상처라고 느껴진다면,

그 속에서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진다면,

더욱 더 현재에 머물고 싶어 진다.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자 한다. 과거의 ‘기억’은 우물이다.

해결되지 못하는, 끊임없이 빠져 들것만 같은 우물. 바닥이 보이지 않아서, 어디까지 떨어질 지 모르는,

정확히 말하면, ‘나’가 그 속에서 떨어져본 적이 있기 때문에, 한없이 작아지고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우물인 것이다.

 

우물


겨우겨우 노력해서 우물을 빠져나왔다. 올라오는 과정에서 많이 다치기도 했다.

손톱이 다치기도, 다리가 부러지기도. 그래도 결국엔 올라왔다.

그래서 이제 우물 밖의 세상을 마음껏 다니려 하는데, 그 우물안에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온 것을 알게 된다.

들어가야 하는데, 다시 꼭 내가 찾고 싶은 물건인데,

지금 당장 너무 필요할 것 같은데,

다시 들어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우물밖에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는다.

우물 밖을 나서서 많은 사람을 보고, 많은 물건을 보며,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을 찾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우물안의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 ‘무언가’를 다시 가져와야만, ‘나’ 자신이 ‘나’ 답다고, 만족하는 실존적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그 우물안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망설인다.

아니. 사실은, 평소에 그 우물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산다.

그 우물로부터 드디어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면서,

다시는 그 우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만족하며 삶을 사는데,

특정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발견될 때마다,

과거 ‘우물’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우물이 있던 방향을 힐끔 쳐다본다.

물론, 한번 쓱 살펴볼 뿐, 다시 걷는다. 다시 우물 밖의 삶을 누리지만,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자신의 발목에 밧줄이 묶여 있고, 그 밧줄이 우물과 이어져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멜랑꼴리’이다.

우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확신’하면서 자신 있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그 우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라고 느낄 때, 자신 자신이 낯설어진다.

우물 밖의 삶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하는 것.

습관적으로 살던 ‘우물 밖의 삶’을 잠시 놔두고, 다시 우물로 돌아가본다.

이제까지는 외면해왔던 우물 안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저 안에 두고 온 ‘무언가’를 가져와야 한다는 용기를 갖고 들어간다.

비록 용기를 냈지만, 조금씩 내려갈 때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무서워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예전의 그 두려움이 다시 몰려온다.

그 두려움은 너무나도 거대하게 느껴져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숨통이 조여온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다.

그렇게, 우물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고, 자신의 무기력함에 지쳐 좌절할 때 즈음, 우물 바닥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물 입구를 올려다보니, 생각보다 우물은 깊이가 낮았다.

처음 우물 바닥을 들여다볼 때,

끝이 없고,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고, 어두컴컴하게만 느껴졌던 그 우물의 바닥은 생각보다 밝았다.

풀도 자라 있었고, 꽃도 있었고, 바닥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우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근거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과거 이렇게 어려웠던 순간에도, 방황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 온 자신의 모습, 자신이 더 마음을 다잡지 않고, 방황했다면, 현재와 같이 건강한 마음으로 우물안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록 이 기억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삶 그 자체였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항상 존재해왔지만,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부정적이고 아픈 기억에만 집중하다 보니,

보지 ‘않았던’ 자신의 멋진 면들을 보게 된다.

아프다고만 여겨졌던 과거 속에도 행복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현재 자신의 삶은 시련 속에서 피워낸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즉, 과거 자신의 시련에서 ‘의미’를 발견해낸다.

이제 ‘나’가 우물안에 두고 온 ‘무언가’를 찾지만, 그 ‘무언가’는 없다.

아무거도 없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없다고 하여 허탈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찾던 ‘무언가’를 이미 찾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는 특정 사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깨달은 바가 바로 그 ‘무언가’였다. 시련이라고만, 여겼던 ‘기억’속에서 ‘의미’를 발견해낸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두고 온 ‘무언가’ 였던 것이다.

이제 그는 우물에서 나오게 된다. 이 우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우물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더 이상 너를 묶어 두는 ‘고통’ 이 아니라, 내 삶을 거쳐간 하나의 평범한 우물이 된다.

이제 그는 그 우물 속에서 깨달은 바를 통해 발목에 걸려 있던 밧줄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물은, 과거의 ‘기억’이다.

우물과 연결된 밧줄에 걸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멜랑꼴리’의 시작점,

우물 안에서 다시 과거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멜랑꼴리’ 그 자체,

이후 시련의 의미를 찾는 순간은 ‘마음의 평정’,

그리고 우물 이후의 삶은 ‘실존적, 본래적’ 삶이다.

 

고통은 의미를 찾는 순간

이상 고통이 아니다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

- 빅터 프랭클

 

우물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바로 ‘우물안에 다시 들어가는 과정’ 이다.

다시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마주할 때, 큰 힘이 필요하다.

만일 이 과정에서, 다시 그 고통에 잠식되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은 끝없는 우물 속으로 빠져들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과정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현재 겪는 고통에 충분히 공감해주고,

어떠한 섣부른 평가나 위로 없이,

그 사람이 그 과정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여기서 바로 ‘진심 어린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심 어린 이해란 무엇일까. 아마 보편적인 의미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순간에서 만큼은 그 사람을 향한 혹은, 우리를 향한 기존의 사회적인 가치관 들이 무의미 해져야 한다.

기존에 그 사람에게 요구되던 사회적 기대, 역할, 의무 등을 벗어야 한다.

‘자기’의 곪은 상처를 치료하려면 자신이 입던 ‘갑옷’ 혹은, 남들이 입혀준 ‘갑옷’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다르게 보는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필자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 재수와 반수에서 연속으로 실패하여, 자신은 ‘실패자’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왔다.

‘’ 나는 ‘실패자’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실패자’가 될 것이다 ‘’’.

이러한 인식으로 4년을 달려가던 중 갑자기 마주한 삶에 대한 회의감,

‘ 나는 영원히 ‘실패자’일 수 밖에 없겠구나’ 라고 모두 좌절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감정이 너무 싫어서, 다른 환경으로 도망가고 싶어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다.

약 2주동안의 시간 동안, 기존의 ‘자기’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친구, 24살의 대학생, 전역한 사람, 등, 기존의 어떠한 의무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온전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그 속에서,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내가 ‘실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괜찮은 면을 발견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심 어린 이해란, 누군가를 통해서 일수도, 혹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용기’와 ‘수용’이다.

나의 상처를 다시 마주하겠다는 ‘용기’와,

그 과정에서 겪는 모든 과정들 혹은 과거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수용’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아픈 것은 당연하고,

그 당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당연하고,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그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용기’있는 ‘수용’

 

본래성은 , 진정한 자신이 되는 용기를 뜻한다. 실존치료의 목적은 삶에서의 자신의 상처를 피하기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그것의 어려움에 직면할 있도록 돕는 것이다.

- 빅터 프랭클

 

수용이란, 현재의 경험을 호기심과 친절한 자세로, 판단이나 선호 없이 마주 하며 지금 순간을 충분히 지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